책소개
본서는 ≪왕궈웨이 유서(王國維遺書)≫(上海古籍出版社, 1983, 第一版, 16冊, 上海書店出版社, 1996, 第二次 印刷, 10冊)에 수록된≪정암 문집(靜庵文集)≫(제3책, 331∼552쪽)을 완역했다. ≪정암 문집≫은 왕궈웨이 자신이 직접 편찬 교정해 단행본으로 출간한 첫 번째 학술 문집으로 광서(光緖) 31년(1905) 9월에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1920년, 1921년에도 상하이의 상무인서관에서 대리 판매를 했고, 당시 ≪도서회보(圖書匯報)≫에도 ≪정암 문집≫이 그대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다가 1924년에 절판되었고, 그 후 왕궈웨이가 사망한 뒤에는 재판되지 않았으며, 사후에는 유서에 편입되어 전해지고 있다.
≪정암 문집≫은 ‘정안 문집’이라고도 일컫는다. 유서의 제1책(第一冊)에 나오는 총목차(海寧王靜安先生遺書總目)를 보면 “정안 문집 1권(靜安文集一卷) 속집 1권(續集一卷)”(제3책 329쪽)으로 되어 있고, 제3책 329쪽에는 “정암 문집(靜庵文集) 부(附) 속집(續集)”으로 되어 있다. 정안(静安)과 정암(静庵)은 모두 왕궈웨이의 자(字)이기 때문에 ≪정안 문집≫, ≪정암 문집≫ 두 가지 명칭 모두 틀리지 않다. 그러나 목차는 왕궈웨이 사후에 편집해 넣은 것이고, 왕궈웨이 자신이 생전에 출판할 때는 ‘정암 문집’으로 명명했으며, 해당 서책에서 ‘정암 문집’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본서에서는 ‘정암 문집’으로 명명했다. 유서에는 ≪정암 문집≫, ≪정암 시고(靜庵詩稿)≫, ≪정암 문집 속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암 시고≫는 고금체시(古今體詩) 50수를 부록으로 붙여 “정암 시고”로 명명한 것이고 ≪정암 문집 속편≫은 왕궈웨이 사후에 후대 사람이 명명하고 편집해서 넣은 것이다. 따라서 본서에서 말하는 ≪정암 문집≫은 부록과 속편을 제외한 ≪정암 문집≫만을 가리킨다.
≪정암 문집≫은 그가 주편을 맡고 있던 잡지 ≪교육 세계(敎育世界)≫에 발표한 글 12편을 모은 것으로 이 글들은 모두 1904년에서 1905년 사이에 발표한 것이다. 주로 철학과 교육학에 대한 글들로 연구 논문집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당시 왕궈웨이는 서양 철학을 공부하면서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의 설을 끌어와 철학, 미학, 문학, 교육학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슴없이 드러냈다. 여기에 수록된 12편의 글을 내용에 따라 분류해 보면 학술과 관련된 글로 <최근 몇 년의 학술계를 논함(論近年之學術界)>(1905), <새로운 학술 용어의 수입에 대해 논함(論新學語之輸入)>(1905), 철학, 미학과 관련된 글로 <철학자와 예술가의 천직을 논함(論哲學家及美術家之天職)>(1905),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교육학설(叔本華之哲學及其敎育學說)>(1904), <쇼펜하우어와 니체(叔本華與尼采)>(1904), <쇼펜하우어 유전설 후기(書叔本華遺傳說後)>[부록: 쇼펜하우어의 유전설(附叔本華遺傳說後), 1904], <현 왕조의 한학파 대진, 완원 두 사람의 철학 학설(國朝漢學派戴阮二家之哲學說)>(1904), <인성을 논함(論性)>(1904), <이치[理]에 대한 풀이(釋理)>(1904), 교육과 관련된 글로 <대중 교육주의를 논하다(論平凡之敎育主義)>(1905), <교육우감 4칙(敎育偶感四則)>(1904), 문학과 관련된 글로 <홍루몽평론(紅樓夢評論)>≫(1904) 등이 있다. 이 문집은 동서고금의 문화가 교차하던 근대 중국에 살았던 한 지식인의 치열한 고민과 사유의 산물로, 여기에는 나중에 국학대사이자 천재 지식인으로, 넓고 깊고 정예로운 학문 세계를 건설해 갈 젊은 왕궈웨이의 초기 사상이 그대로 들어 있다. 왕궈웨이는 이 문집에서 당시로는 대단히 파격적인 주장을 통해 중국의 신문화 창조에 이바지하려고 했지만 이 문집은 발표 당시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정암 문집≫을 편찬할 당시에 왕궈웨이는 서양 철학에 대해 깊은 회의와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그 후 철학을 버리고 문학으로 전향했으며, 그 뒤에 다시 문학에서 국학 연구로 전향하게 된다.
200자평
중국 최고의 국학자 왕궈웨이. 그가 직접 편찬 교정해 출간한 첫 학술 문집 ≪정암 문집≫을 소개한다. 중국 최초로 독일 철학을 소개하고 아울러 중국의 전통 철학과 서양 철학의 비교 연구를 시도했다. 그의 철학과 미학, 문학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보아야 할 책.
지은이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는 마지막 황제 푸이(傅儀)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 자는 정안(靜安), 정암(靜庵), 백우(伯隅) 등이고 호는 예당(禮堂)이며, 만년에는 영관당(永觀堂)이라고 했다가 관당(觀堂), 영관(永觀)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다]는 철학, 미학, 문학, 희곡사, 갑골문, 금문(金文), 고대 기물, 은주(殷周) 역사, 한대와 진대(晉代)의 목간(木簡), 한위(漢魏)의 비각(碑刻), 둔황(敦煌) 문헌, 서북지리(西北地理), 몽고사 등을 연구해 각 영역에서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왕궈웨이는 1877년(청 광서 3년) 12월 3일(음력 10월 29일) 진시(辰時)에 저장성(浙江省) 하이닝[海寧, 지금의 하이닝시(海寧市) 옌관진(鹽官鎭)] 솽렌항(雙仁巷)에서 태어났다. 1892년(광서 18년, 만 15세) 7월에 주학(州學)에 들어가 하이닝주(海寧州)의 세시(歲試)에 참가해서 21등으로 합격해 수재(秀才)가 된다. 이때 왕궈웨이는 그 고을에서 이름을 떨쳐 천소우첸(陳守謙), 예이춘(葉宜春), 주자요우(褚嘉猷) 등과 함께 “하이닝의 네 재주꾼(海寧四才子)”으로 불렸다.
1898년 2월에 왕궈웨이는 상하이로 가서 일을 찾던 중 친구의 주선으로 시무보관(時務報館)에 취직한다. ≪시무보≫는 진보적 저널리스트인 왕캉녠(汪康年)이 주필을 맡고 있던 유명 시사 잡지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서기와 교정 일을 보았다. 3월 22일에 뤄전위(羅振玉)가 세운 동문학사(東文學社)가 개학하자 왕궈웨이는 왕캉녠의 동의를 받아 이곳에서 매일 오후 몇 시간 동안 영어와 일어,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습득했는데, 주로 화학, 물리, 수학, 지리 등의 자연과학이었다. 동문학사에서 왕궈웨이는 평생의 후원자인 뤄전위를 만난다.
1901년, 봄에 왕궈웨이는 친구 판빙칭(樊炳淸)과 함께 뤄전위의 요청으로 우창(武昌)의 후베이농무학당(湖北農務學堂)으로 가서 농업 관련 서적과 사건들을 번역하게 된다. 이해 5월에 뤄전위는 상하이에서 잡지 ≪교육 세계(敎育世界)≫를 창간해 왕궈웨이에게 주필을 맡겼다. 왕궈웨이는 이 잡지를 통해 자신의 글과 번역문을 많이 발표하게 되는데, 나중에 여기에 수록된 글의 일부를 모아 ≪정암 문집≫을 출간한다.
1902년 2월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다. 왕궈웨이는 일본에서 스승 후지타의 권유로 이과 공부를 하게 되는데 낮에는 영어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도쿄 물리학교에 가서 수학을 공부했다. 왕궈웨이의 일본 유학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도쿄에 머문 지 4, 5개월 만에 각기병이 재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뤄전위의 동의를 얻어 결국 여름에 귀국하고 말았다.
1903년 3월 왕궈웨이는 퉁저우사범학당(通州師範學堂)에 부임했고 1904년 말에는 장쑤사범학당에서 심리학, 윤리학, 사회학 등을 가르쳤다. 이때 후지타 선생 역시 이 학교에 있었으므로 왕궈웨이는 틈나는 대로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06년(광서 32년, 만 29세) 봄에 청 정부는 학부(學部)를 신설한다. 이때 뤄전위는 돤팡의 추천으로 학부에서 일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정식으로 참사관(參事官)이 되었다. 이에 왕궈웨이 역시 뤄전위를 따라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집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교육 세계≫의 원고를 집필했다. 1907년 봄에는 뤄전위의 추천을 받아 학부총무사행주(學部總務司行走)가 되었고, 학부 도서관에서 편집과 교과서 등을 편역하고 심의하는 일을 맡는다.
베이징에 온 이후 대략 이 시기부터 왕궈웨이는 철학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되는데, 대략 2, 3년 전, 즉 1904년경부터 이미 철학에 대해 번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형이상학적 염세주의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체계가 자기 자신의 견식 있는 직관적 지식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철학에 대한 이와 같은 회의가 지속된 결과 1907년경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문학으로 전향하게 된다. 1907년은 왕궈웨이가 철학에 대한 사상적 번민을 거친 뒤 문학을 통해 ‘직접적 위로’를 얻기 위해 사와 희곡 연구로 학술 방향을 전환한 시기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해 12월에 왕궈웨이는 뤄전위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다. 1911년 이후부터 뤄전위가 왕궈웨이의 학문에 끼친 영향은 특별하다. 뤄전위는 회의주의와 서양 관념의 영향으로 청조가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이 줄곧 인정하고 지원했던 왕궈웨이와 같은 사람이 학자적 의무로서 국학을 하기를 희망했다. 뤄전위는 왕궈웨이에게 국학 연구에 최선을 다해 보자고 권유했고 왕궈웨이는 이때부터 “이전의 학문을 다 버리고 오로지 경학과 역사학을 연구했다”.
1916년 1월 2일 왕궈웨이는 4년 동안 머물던 일본을 떠나 상하이로 돌아왔다. 1916년 초에 하둔이 새로 만든 잡지 ≪학술 총편(學術總編)≫의 편집인으로 고용되어 학술 잡지를 편집하면서 교토에서와 마찬가지로 학술 연구에 매진했다. 그 후 1918년부터 창성밍즈대학(倉聖明智大學) 교수를 겸임했다. 왕궈웨이는 상하이에서 약 7, 8년간을 머물렀다.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지만 학술상의 업적은 풍요로웠으니 그의 유명한 논저는 모두 이 시기에 쓰였고, 명성도 점점 높아만 갔다.
1923년 음력 3월 1일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양종시(楊鍾羲), 징팡창(景方昶), 원쑤(溫肅), 왕궈웨이를 모두 남서방 행주로 임명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직무는 학문 강론, 서적 조사, 시 낭송, 그림 그리기, 골동품 감상 등으로 청반(淸班), 즉 소위 문학(文學) 시종지신(侍從之臣)에 속했다. 그러나 황제의 신임을 얻어 초안 작성을 돕거나 정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서방 행주라는 직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24년 펑위샹(馮玉祥)의 국민군이 베이징을 침략해 새로운 내각을 만들고 푸이를 자금성에서 내쫓았다. 황제가 일본 영사관으로 피신한 뒤 왕궈웨이는 후쓰의 추천을 받아들여 1925년부터 칭화대(淸華大) 국학연구원의 교수가 되었다. 칭화대학에서 왕궈웨이의 생활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무엇보다 연구소에서 그는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둘러싸였으며 그들은 모두 그를 학자로서 인간으로서 존경해 주었다. 왕궈웨이는 이곳에서 그 자신의 지적 흥미를 추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후에 그는 초기 몽골 시기의 역사와 지리 연구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이 시기에 왕궈웨이는 또한 국가적 사업으로 서북 변경 지리(西北邊疆地理)와 요(遼), 금(金), 원(元)의 역사를 연구했다. 당시 그는 학계의 거두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이 되었는데, 거의 쉰이 다 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와 고대 소수 민족 문자에 정통한 소장학자 뤄쥔추(羅君楚, 당시 20여 세)와 천인커(陳寅恪, 당시 30여 세)에게 찾아가 배움을 청할 정도로 학문에 정열을 쏟았다.
청화원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내던 그는 1926년 말엽 일련의 심각한 사건을 겪으면서 우울해졌다. 1926년에 그의 장남이 사망한 데다 장례 문제로 그의 아내와 며느리(뤄전위의 딸)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오랜 후원자인 뤄전위와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하게 된다. 게다가 1927년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시대의 불안감은 극대화되었고 그는 나라의 미래와 황제의 안전에 대해 낙담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해 대단히 비관적이었고 자살하기 바로 전날인 1927년 6월 1일에 삶의 허무와 체념을 드러낸 글을 남기고, 다음 날 오전 이허위안(頤和園) 쿤밍호(昆明湖)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의 몸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이 세상의 변화를 겪게 되었으니, 옳음으로 다시는 욕되지 않으리라”라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황제 푸이는 왕궈웨이에게 “충각(忠悫)”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옮긴이
류창교는 안동 하회에서 태어나 한국고등 교육재단에서 한학연수 장학생으로 사서삼경을 수학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왕국유(王國維) 문예 비평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동아시아어문과 특별연구원, 중국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방문학자, 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부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미국(美國)의 중국 문학(中國文學) 연구(硏究)≫(2003), ≪세상의 노래 비평, 인간사화(人間詞話)≫(역주서, 2004),≪왕국유 평전≫(2005), ≪완역 설도 시집≫(2012), ≪완역 어현기 시집≫(2013) 등이 있고, 중국 고전 문학과 중국 여성 문학에 대한 논문이 여럿 있다.
차례
자서(自序)
1. 인성을 논함(論性)
2. 이치에 대한 풀이(釋理)
3.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교육학설(叔本華之哲學及其教育學說)
4. 홍루몽 평론(紅樓夢評論)
5. 쇼펜하우어와 니체(叔本華與尼采)
6. 현 왕조의 한학파 대진, 완원 두 사람의 철학 학설(國朝漢學派戴阮二家之哲學說)
7. 쇼펜하우어 유전설 후기(書叔本華遺傳說後)
부록: 쇼펜하우어의 유전설(附: 叔本華氏之遺傳說)
8. 최근 몇 년의 학술계를 논함(論近年之學術界)
9. 새로운 학술 용어의 수입에 대해 논함(論新學語之輸入)
10. 철학자와 예술가의 천직을 논함(論哲學家與美術家之天職)
11. 교육우감 4칙(教育偶感 四則)
12. 대중 교육주의를 논하다(論平凡之教育主義)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으로는 하나는 선천적 지식이고, 하나는 후천적 지식이다. 선천적 지식은 공간과 시간의 형식 및 오성(悟性)의 범주처럼 경험할 필요 없이 생겨나 경험이 그것을 경유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으로 칸트의 지식론이 나온 뒤부터 오늘날 거의 정론이 되었다. 후천적 지식은 바로 경험이 나를 가르치는 것으로 무릇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이것이다. 양자의 지식은 모두 확실성이 있는데 다만 전자는 보편성과 필연성이 있고, 후자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 확실함은 다를 게 없다. 지금 시험 삼아 묻겠는데 본성[性]이라는 것을 과연 선천적으로 아는가? 아니면 후천적으로 아는가? 선천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의 형식이며 지식의 재질에는 미치지 못하는데 본성[性]은 진실로 지식의 한 재질이다. 만약 후천적으로 그것을 안다면 아는 것은 또한 본성[性]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으로 아는 본성[性]은 유전과 외부의 영향을 받는 것이 적지 않아서 본성[性]의 본래 면목이 아님이 진실로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언컨대 본성[性]이라는 것은 우리의 지식을 뛰어넘는다.
2
칸트는 통상 이성이라고 말하는 것을 오성이라고 말하고, 이성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우리가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감각을 결합함으로써 직관을 이루는 것은 감성의 일이고, 직관을 결합해 자연계의 경험을 하는 것은 오성의 일이며, 경험의 판단을 결합해 형이상학의 지식을 만드는 것은 이성의 일이라고 했다. 이 특별한 해석으로부터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은 마침내 이성을 우리가 감각적 능력을 초월해 본체의 세계와 그 관계를 곧장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다만 셸링과 헤겔 무리는 유쾌하게 만족해서 이성의 체계를 조직했는데 그러나 우리의 지력 중에 과연 이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본체의 세계가 과연 이 능력으로 인해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두 따지지 않았다. 쇼펜하우어가 나타나 비로소 엄격하게 오성과 이성을 구별했다. 그는 <충족 이유의 논문>에서 직관 속에 이미 오성의 작용이 존재함을 증명했다. 우리에게 오성의 작용이 있어 이에 직관의 세계가 있고, 이성의 작용이 있어 비로소 개념의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소위 이성이라는 것은 개념과 분석 종합의 작용을 만드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 작용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사업은 이미 충분히 동물을 훨씬 능가한다. 초감각의 능력은 우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그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충족 이유의 논문>에서 그것을 수천만 마디로 구별했고, 그런 뒤에 이성의 개념이 찬란히 다시 세상에 밝혀졌다. 맹자가 말했다. “마음이 똑같이 그러한 바는 무엇인가? 이(理)고, 의(義)다.” 정자(程子)가 말했다. “성이 곧 이다(性卽理也)”. 이(理)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비록 논리학적 가치 외에 또 윤리학적 가치를 부여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理)를 마음의 작용으로 본 경우를 살펴본다면 진실로 이성(理性)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3
쇼펜하우어의 설에 따르면 비극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 비극은 극악무도한 사람이 그가 지닌 능력을 다 동원해 얽어 놓은 경우다. 둘째는 맹목적 운명에서 비롯한 것이다. 셋째 비극은 극 중 인물의 위치와 관계가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로 반드시 악독한 성질이나 뜻밖의 변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보통의 인물이 보통의 경우를 당해서 그를 핍박해 이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로 그들은 그 해악을 훤히 알아 번갈아 가하고 번갈아 받으며 각기 애를 다 써 보지만 각자 허물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러한 비극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앞의 두 가지 경우보다 훨씬 심하다. 왜 그런가? 그것이 인생의 최대의 불행이란 예외가 없고 인생 본래의 것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앞의 두 비극의 경우 우리는 악독한 인물과 맹목적 운명에 대해 두려워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오히려 요행히 우리 인생에서 모면할 수 있으며 잠시 쉴 곳을 꼭 찾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셋째 경우에는 이 비상한 세력이 인생의 행복을 충분히 파괴할 수 있어서 때때로 우리 앞에 떨어지지 않음이 없으며, 또한 이와 같은 참혹한 행위는 때때로 자신이 받을 뿐만 아니라 혹은 다른 사람에게 가할 수도 있어 몸소 그 가혹함을 당하면서 불평의 소리를 낼 수가 없으니, 이것은 천하에서 지독한 참혹이라고 할 만하다. ≪홍루몽≫의 경우는 바로 셋째 비극이다. 여기서는 보옥과 대옥의 사건을 들어 말해 보겠다. 가모(賈母)는 보채의 아름다움과 유순함을 사랑하고 대옥의 괴팍함을 경계했다. 또한 금옥(金玉)의 사악한 말을 믿고 보옥의 병을 진정시킬 생각을 했다. 왕 부인은 진실로 설씨(薛氏)와 친하고, 봉저는 집안 살림을 돌보고 있기 때문에 대옥의 재주를 시기하고 그것이 자신을 불편하게 할까 봐 걱정했다. 습인(襲人)이 우이저(尤二姐)와 향릉(香菱)의 사건을 경계하다가 대옥이 “동풍이 서풍을 넘어뜨리지 않으면 서풍이 동풍을 넘어뜨리기 마련이다”라고 한 말(제82회)을 듣고는 재앙이 미칠까 두려워 스스로 봉저에게 붙은 것은 또한 자연의 형세다. 보옥은 대옥에게 날마다 맹세하면서도 그를 가장 사랑하는 조모에게는 말할 수 없었으니 보편적 도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물며 대옥 같은 일개 여자의 경우에랴? 이 몇 가지 원인으로 금과 옥이 합하고 나무와 돌은 헤어지게 되었으니, 또한 어찌 악독한 인물이 있었다거나 특이한 변고가 그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겠는가? 보편적 도덕과 보편적 인정 그리고 보편적 경우가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다. 이로 볼 때 ≪홍루몽≫은 비극 중의 비극이라고 할 만하다.
4
지금 돌아보건대 우리나라 사회는 정의 사상의 결핍이 실로 놀라울 정도인데, 어찌 평민만 그러하겠는가? 설령 평소 개명한 신사라고 부르는 자라도 결국 멍청해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전에 어떤 부서에서 중학교를 세우려는 자가 있었는데 그 부지가 사찰과 인접해 있어서 결국 관력(官力)으로 사찰을 겸병(兼倂)해 소유하고 게다가 승려들에게 낭패를 보게 해 다른 곳으로 옮기고선 기쁘다고 말했다. 이는 도둑도 하지 않는 짓이다. 원래 이 사찰의 건립은 틀림없이 사회적 물리력에 의한 것이었겠지만 승려가 그곳에 거처하고 경영한 것이 수백 년이라면 그것이 개인의 재산이 된 것은 진실로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고 강한 힘으로 약자가 가진 것을 빼앗아 소유하고, 게다가 그들로 하여금 고발할 데가 없게 하니, 승려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것이 도적보다 심하다고 해도 정말 지나치지 않다. 가령 다시 강하고 힘이 있는 자가 나와 이 학교를 빼앗아 그것을 소유한다면 이 학교를 창설한 자의 감정이 또한 어떻겠는가? 저 생도한테 이런 강의실에 들어가 이런 기숙사에 살면서 정의의 덕성을 함양하게 한다면 어찌 물러나면서 앞으로 가고자 하고, 수레의 끌채는 남쪽을 향하게 하고 바퀴는 북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